머리를 어깨 너머까지 길렀다. 체지방을 줄이고 근육을 늘렸다. 꾸준히 노력해 사투리 억양을 익혔다. 쾌활한 웃음소리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배우 김지훈이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덴버를 연기하기 위해 거친 과정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데뷔 20년 만에 일궈낸 뿌듯한 성과다.
“결혼해달라는 메시지가 그렇게 많이 오더라고요.” 화면 너머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난 1일 화상으로 만난 김지훈의 얼굴엔 흐뭇함이 묻어났다. 그가 연기한 덴버는 단순하고 욱하는 성미와 함께 인간미와 순수함을 갖췄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맹수 같은 눈이 번뜩이다가도, 사랑하는 미선(이주빈)을 바라볼 때면 애틋함이 가득했다. 덴버는 웃음과 긴장감, 멜로까지 넘나들며 전방위로 활약했다. 김지훈은 원작 속 덴버를 바탕으로 자신의 색을 더해 한국판 덴버를 만들어냈다.
“리메이크를 결정하기 전부터 원작 팬이었어요. 그래서 리메이크 소식을 듣자마자 꼭 함께하고 싶었죠. 흥행한 작품의 인기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니,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대본을 보는 순간 원작에 얽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어, 정서, 문화가 다른 데다 한국판은 ‘공동경제구역’이라는 새 설정이 추가됐잖아요. 그래서 기존에 알던 덴버를 지우고 대본에 충실한 덴버를 구현했어요. 덴버의 상징인 웃음소리만 오마주 하려 했죠.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아 감사했어요.”
리메이크 작품은 호불호가 갈리기 마련.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김지훈은 “원작이 워낙 유명하지 않나. 예상한 지점이었다”면서 “숙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김지훈의 덴버에는 호평이 잇따랐다. 특히나 그가 이주빈과 함께한 로맨스에는 전 세계 팬들도 열광했다. 반응을 실감하냐는 질문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잘 느끼고 있다”며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행복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주말드라마를 할 땐 인기를 끌어도 젊은 층들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해 모든 걸 쏟아부으며 연기해도 제가 활동 중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었고요. 참 속상했죠. 하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다 보니 관심도가 파격적으로 늘어났어요. SNS만 봐도 반응을 체감해요. 열심히 임한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된 것 같아서 감사할 뿐이에요.”
열심히 했다는 말 그대로다. 김지훈은 덴버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변신을 감행했다. 2020년 방송한 tvN ‘악의 꽃’에서 목선을 덮을 정도였던 장발은 날갯죽지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탄탄한 근육도 자리 잡았다. 후배 배우 배현경, 래퍼 사이먼 도미닉(쌈디)과 따로 만나 부산 사투리를 배웠다. “촬영 시작 세 달 전부터 사투리를 연습했다”고 회상하던 김지훈은 “외국어 공부하듯 억양을 계속 반복하며 열심히 노력했다”고 말했다. 장면마다 디테일을 가미해 자신의 색을 채워갔다. 미선을 만나러 가는 덴버가 콧노래를 부르며 머리를 풀어헤치는 장면은 그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대표적인 예다. 고민과 노력, 두 과정을 거치며 즐겁게 연기했다.
“뭔가를 해내면 만족감과 보람이 커요. 동시에 새로운 갈증이 생기죠. 스스로 부족함을 늘 느끼거든요. 저는 저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요. 아쉬운 점을 만회하려고 더 열정을 다해 임해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을 통해 섹시하고 퇴폐적이라는 반응이 나온다고 들었어요. 칭찬을 받으니 퇴폐미를 가진 한국의 대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물론, 그 이미지만 고집하진 않을 거예요. 어느 정도 어필된 것 같으면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거예요. 작품마다 새 얼굴이 되고 싶어요. 배우로서 꿈꾸는 이상향이죠.”
김지훈이 앞서 TV조선 ‘바벨’과 ‘악의 꽃’으로 이미지 변신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을 발판 삼아 새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데뷔 20년 차지만 15년을 주말드라마 실장님으로만 살았다”며 말을 잇던 그는 “늘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날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고정된 이미지를 깰 때”라며 당차게 말했다. 그는 올해 하반기에 공개되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2에 이어 새로운 차기작을 결정, 준비에 한창이다. 김지훈은 “연말까진 계속 장발일 것 같다”면서 “앞으로 역할에 따라 변신 가능성이 열려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과거엔 선택지가 주말드라마와 일일드라마 뿐이었어요. 이젠 달라졌어요. 더 다양한 작품을 제안받고 있죠. 열심히 노력해서 이뤄낸 결과라 보람차요. 제 시야도 넓어졌어요. 재미있는 대본과 흥미로운 캐릭터를 고집하게 되더라고요. 앞으로는 제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연기하고 싶어요. 멜로도 탐나고, 제복을 입는 캐릭터도 연기해보고 싶어요. 멋지게 소화할 자신이 있어요.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파트 2에도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미선과의 로맨스와 갈등, 아버지 모스크바(이원종)와의 대립 등 여러 가지가 준비돼 있거든요. 파트 2에서 큰 축을 담당할 덴버의 활약을 지켜봐 주세요.”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