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은 그녀가 시녀 한 명만 동반하고 가명으로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 일어났다. 당시 제네바의 한 신문이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베트(시시)가 제네바에 체류 중이다"라 보도하면서 그녀의 신분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 기사를 눈여겨본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인 아나키스트 루이지 루케니(Luigi Lucheni)였다.
루케니는 본래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왕족을 암살하려 했으나, 그 왕족이 일정을 변경해 제네바를 떠나자 좌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시가 제네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왕족이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며 범행 대상을 시시로 바꿨다. 시시가 유람선을 타기 위해 제네바 호숫가를 걸어가고 있을 때, 루케니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녀의 가슴을 세차게 들이받았다.

루케니가 휘두른 것은 칼이 아니라 가늘고 날카롭게 간 송곳처럼 뾰족한 줄이었다. 시시는 그저 괴한이 자신을 밀쳐 넘어뜨린 줄로만 알았다. 꽉 조여 입은 코르셋 덕분에 출혈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그녀는 털어내고 일어나 배에 탑승하기까지 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배가 출발한 후, 시시는 급격한 호흡 곤란을 느끼며 쓰러졌다. 코르셋을 풀자 그제야 가슴에 아주 작은 바늘구멍 같은 상처가 보였고,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루케니의 송곳이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를 소장하게 된 경로도 흥미롭다. 1883년 마네의 미망인 수잔 린호프가 아들 레옹 린호프에게 상속했고, 그는 파리에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매각했다.
이후 1909년 볼라르는 프랭크 게어 매콤버에게 작품을 넘기며 판매와 운송을 담당했고, 결국 매콤버 부부가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했다.
매콤버는 화가 메리 카사트의 추천으로 파리의 “켈레키안의 가게”에서 그림을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미술관에서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들의 소장 경로에는 메리 카사트와 볼라르가 자주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한 황제의 처형을 담은 그림일 뿐만 아니라, 예술, 정치, 역사, 그리고 미술 시장까지 교차하는 복합적인 맥락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860년대 초,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으로 멕시코 황제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이 즉위했다. 이미 대통령이 있는 상태에서 그의 통치는 재정 파탄과 군사적 패배, 그리고 보수층의 지지 상실로 점점 흔들렸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자유주의 지도자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공화국은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고, 결국 막시밀리안은 케레타로에서 체포되었다.
군사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고, 1867년 6월 19일, 막시밀리안은 충성스러운 장군 미겔 미라몬과 토마스 메히야와 함께 총살형을 당했다. 세로 데 라스 캄파나스(Cerro de las Campanas)언덕에서 울린 총성은 멕시코 군주제의 종말을 알렸고, 멕시코는 다시 공화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처형은 국제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유럽에서는 "문명국의 황제가 신대륙에서 총살당했다"는 사실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멕시코의 주권을 지켜낸 상징으로 남았고, 동시에 유럽 제국주의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국 그는 "이방인 황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황제의 왕관을 썼지만, 그 왕관은 곧 무거운 족쇄가 되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마네는 이 유화스케치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록과 미술사를 참고했다. 특히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는데, 마네는 1865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직접 이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이 나폴레옹 군대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키자, 이튿날인 5월 3일 새벽 프랑스 군대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붙잡힌 스페인 민중들을 이 언덕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살형에 처했다.
스페인 화가 고야는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프랑스군이 스페인 민중을 총살하는 순간, 그는 희생자의 얼굴에 비친 공포와 절망을 화폭에 담는다.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두 팔을 벌려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처럼 보였고, 군인들의 차가운 등 뒤와 대비되며 관객에게 강렬한 충격을 던졌다. 고야의 그림은 인간의 고통과 자유를 향한 절규였다.
고야는 강렬한 명암 대비를 유독 강조하기 위해 등불만으로 극적인 현장감과 비극성을 극대화했다.
약 60년 뒤, 프랑스 화가 마네는 또 다른 총살 장면을 그린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공화군에 의해 처형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마네는 고야처럼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았다. 대신 군인들을 무표정한 기계처럼 배열하고, 사건을 냉정하게 기록했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은 희생자의 얼굴과 감정을 강조했지만, 마네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냉정한 리포트처럼 사건을 기록해, 감정적 호소보다 정치적 고발에 집중했다. 오늘날, 마네는 예술을 통해 권력의 폭력을 기록하고 비판한 초기 예술가로 평가된다.

이 그림은 침략자인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 이에 맞선 스페인 민중 간의 처절한 사투를 담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칼날이 달린 총검을 겨누고 있는 프랑스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인물 전체가 묘사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정렬된 총신과 군복의 일부만 노출되어 있어, 감정이 없는 잔혹한 학살 기계처럼 연출되었다.
화면 중앙과 왼쪽에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스페인 민중들이 묘사되어 있다. 한 남자는 칼을 쥐고 프랑스 군인을 향해 돌진하고, 다른 남자는 이미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 인물들의 발 밑에는 격렬한 전투의 결과로 처참하게 쓰러진 시신들이 뒹굴고 있다.
고야가 숨겨둔 진심과 풍자는 제목의 잔인한 뉘앙스에서 빛을 발한다. "옳든 그르든", 이 제목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인간이 행하는 학살에 던지는 고야의 가장 냉소적이고도 슬픈 탄식이다.
"프랑스군의 침략이 옳든 그르든, 스페인 민중의 저항이 옳든 그르든, 결국 남는 것은 서로를 잔인하게 도살하는 비극뿐이다”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실제 벌어지는 행위는 그저 야만적인 폭력일 뿐이라는 고발이다.
고야는 평소 무지와 미신을 비판하며 ‘이성‘을 강조해 왔다. 하지만 이 그림의 스페인어 원제에 쓰인 ‘이성(Razón)‘은 완전히 짓밟혔다. 정당한 이유(Reason)가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비이성적인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이 왔음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화려한 무기와 군복으로 무장한 프랑스 정규군과 급조된 칼 한 자루나 맨손으로 맞서는 스페인 민중의 대비를 통해, 전쟁이 가진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폭력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다음 편에 계속>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